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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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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창영 작성일2005-12-27 09:27 조회2,099회 댓글1건

본문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가수는 입을 다무네> - 기형도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군데 쓸어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보면 축축한 등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여기 떠돌이 가수가 있다. 가랑비 자욱한 골목의 인파 속에 뒤섞여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떠돌이 가수가 중얼거리며 걷고 있다. 모든 세월이 그를 늘 법으로 몰아냈으나, 그럼에도 너무 많은 거리가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를 계속 떠돌게 했다. 그는 지금 얇고 검은 입술을 굳게 닫고 노래를 부르지 않으나 걸어가면서도 그는 기억한다. “그때 나의 노래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던 시절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자기의 존재의 상처 속에서 일어나는 울음을 알리라. 스스로는 처절한 비극이라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안고 살아가리라. 그처럼 가수는 자기 존재의 비극으로 노래를 불렀으나 단순한 여자들, 세속적인 여자들은 가수의 인기에만 열광했다. 그 가수를 차지하려고 난투극을 벌이고 그런 것을 그때는 행복하게 여기기도 했다. 결코 욕할 수 없는 어리석었던 청춘의 때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제 가랑비에 젖어 걸으며 중얼거릴 뿐이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다고.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다고. 나를 괴롭힐 장면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하고. 가다가 모퉁이에선 외투 깃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하지만 그가 누구든 나는 그에게 엄청난 추억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도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누구든 자기 고백을 먼저 들어주었으면 하니까. 자기가 건넌 산이 가장 높고 자기가 건넌 강이 가장 깊은 걸로 생각하니까. 떠돌이 가수이기에 정주의 욕망이 가득했겠지만 그 정주의 곳으로 들어갈 입구를 끝내 못 찾아 모든 것을 취소해버리고 싶었던 삶. 그러나 “나는 어떤 탈출구도 알지 못한다”고 했던 카프카처럼 입구뿐만 아니라 역시 탈출구마저 없는 삶에 대해 누군가 한번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봐 준적이 있는가.

그는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까닭 없이 찌푸리지만 그게 왜 까닭이 없겠는가. 그의 마음은 이제 고통에게서조차 버림받았으니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삶은 떠돌이들을 한군데 쓸어담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 또한 떠돌이 아니고 무엇인가.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그의 입술은 바스락거리고 깨달음은 뒤늦지만 우리라고 해서 무슨 선험적 깨달음이 있겠는가. 이제 태양이 쨍하게 내리쬔들 검은 외투를 입고 비에 젖어 중얼거리며 걷는 저 중년 사내의 절망과 우울을 어떻게 말려줄 것인가. 이제 수많은 인파 속 가랑비도, 사내조차도 멀리 원경의 실루엣으로나 소멸해가고 마는데 무슨 구원의 손길이 있어 그를 집으로 안내할 것인가. 아니 당신도 나도 떠돌이 가수가 아닌가. 나는 비극을 노래하나 당신은 나를 웃어대지 않는가. 당신은 입구를 모르지만 나는 탈출구를 모르는 삶 아닌가. 어차피 서로의 고백을 들어주지 못할 바에야 검은 입술을 꽉 다물고 노래를 그만 둘 수밖에. 마른 가랑잎 같은 소멸에 삶을 맡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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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창영님의 댓글

김창영 작성일

  가사를 지대로 외우지 못하고 흥얼거리며 따라하다가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노래를 하지 않는 심정을 이해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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